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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면주(申冕周) 순조대 후반 정국과 근기남인의 역할
순조대 후반 근기남인(近儀南人)은 당시 정국에서 주요 세력이었던 안동 김
씨(安東金氏) 세력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였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대리
청정이 시작된 직후 전 초산부사 서만수(徐萬修)의 탐학상이 보고되자,서만수
의 아들 서유규(徐有里)가 서만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동시에 봉조하 이조원
(李擊源)과 대호군 김기후(金基厚)를 공격하였으나, 효명세자는 미온적인 반
응을 보였다. 그러자 사간 홍영관(洪永觀)과 지평 한진호(韓鐵房)가 이조원에
게 처분을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효명세자는 이를 거부하며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홍영관과 한진호는 모두 근기남인으로서 안동 김씨 가문과 우호적 인 관계에
있었다. 서만수가 공격받고 처벌된 사안은 대리청정 초기 효명세자의 김조순계
견제라는 성격을 가지며,서유규의 호소는 김조순계의 반발이 담겨있는 정치적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김조순계의 입장에 서서 이조원을 탄핵한 근기남인
의 행위는 김조순계와 근기남인이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사실을 잘 나타
낸다고 할 수 있다.
서만수 사건 이후에도 효명세자는 자신을 지지해줄 측근세력을 형성하며 입
지를 강화해나갔다. 측근관료로는 청명당(淸明黨) 인사들과 친인척관계에 있
던 김로(金鑛),이인부(李貪博),김노경(金魯敬) 등과 조만영(趙萬永),조인영
(趙貪永)으로 대표되는 풍양 조씨 (豊壞趙氏) 가문 세력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근기남인 심영석(沈英銀)과 한진호,그리고 이유하(李SS)는 김조순의 7
촌 조카인 호조판서 김교근(金敎根)과 그 아들 김병조(金期朝)를 탄핵하였다.
근기남인의 김교근 부자 탄핵은 효명세자의 정국 주도 및 세력 확대에 대한 김
조순계의 견제라고 할 수 있다. 김교근이 비록 김조순의 가까운 친척이기는 하
지만,효명세자의 비호를 받으며 그 측근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였기 때문
이 다.
효명세자 사후,김조순계는 김교근을 비롯하여 대리청정기에 발탁된 노론 청
류들을 탄핵함으로써 한동안 위축되었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한 반면,순
조(純祖)는 재집정을 통해 대리청정 이후의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고자 하였
다. 효명세자가 흥서한 직후,삼사에서는 효명세자가 복용할 탕제에 자기 마음
대로 시험 삼아 재료를 첨가한 약원제조 홍기섭(洪起變)을 엄중히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순조는 이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성토의 대상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신료들이 김로의 죄상을 거론하며 국청을 설치하여 전형을 바
로잡기를 청한 것이다.
그러던 중 근기남인 부사과 김우명 (金遇明)이 상소하여 전 평안도관찰사 김
노경의 처벌을 청하였다. 김우명이 상소하고 나서 김조순계 인사들이 뒤이어
김노경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는데,이 역시 김교근 사건 때와 매우 유사한 현상
이었다. 한편 순조가 여 러 죄인들의 석방을 하교함에 따라 유배되었던 노론 청
류들이 비로소 석방되었고,탄핵을 받아서 끝내 유배되었던 김노경도 석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리청정 당시 처벌받았던 심영석과 한진호를
비롯한 근기남인이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심영석과 한진호의 석방은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위기를 맞았던 김조순계의 권력이 순조 재집정기에 이르러 다시
안정화되었음을 뜻한다.
순조가 재집정한 뒤 근기남인이 곧바로 효명세자에 의해 발탁된 노론 청류
들을 탄핵한 행보는 근기남인과 효명세자의 정치 노선이 달랐음을 증명해준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순조대 후반까지 근기남인과 김조순계가 여전히 협력 관
계에 있었으며,근기남인이 김조순계의 우익 역할을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